칸트 탄생 300주년 기념

칸트 탄생 300주년 기념 인터뷰 <Sonntagsblatt*> 2024년 1월 2일 (*독일의 주간지)

질문자: Uwe Gepp (신학자, Sonntagsblatt 편집장)

대담자: Marcus Willaschek 교수 (마르쿠스 빌라셰크,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철학과 교수)

문: 그가 태어난 지 300년이 지났는데도 왜 칸트는 여전히 중요합니까?

답: 칸트는 근대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입니다. 그 중요성은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칸트는 계몽주의 철학자, 즉 자유와 비판적 공론장, 민주주의와 법치국가를 옹호하는 계몽주의자이며, 무비판적 생각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것을 촉구하는 계몽주의자입니다.

둘째, 칸트는 중요한 윤리학자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칸트의 그 유명한 정언명령을 자신의 도덕적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셋째, 칸트는 중요한 인식 이론가입니다. 세계는 우리가 인식하는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세계를 구조화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적극적 인식 행위를 통해서 말이죠. [가령] 공간과 시간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형식일 뿐입니다. 이러한 칸트의 놀라운 생각은 칸트 시대엔 매우 혁명적인 것이었고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렸습니다.

문: 오늘날 우리는 복합적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또 지금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 증가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과연 우리 시대는 칸트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답: 칸트가 현재의 정치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하겠지요. 칸트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중요한 것은 교양(敎養, Bildung)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계몽된 교양 시민만이, 칸트식으로 말하면 성숙한 시민만이 현재와 같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칸트는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계몽의 가치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자유롭고 합리적인 존재로 이해하도록 만드는 핵심입니다. 명확하고 깊은 사유는 그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반면에 피상적인 사유는 우리를 가령 ‘독재자 아래서 사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으로 끌고 갈 수 있습니다.

문: 칸트는 진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오늘날에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답: 칸트가 믿은 것은 진보의 불가피성이 아니라 진보의 가능성이었습니다. 진보는 우리가 하기 나름이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진보는 우리 각자에게 달려있으며 우리는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칸트에게 이것은 도덕적 명령입니다.

문: 정언명령이라는 말씀이시지요.

답: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 규칙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나는 관여하지 않을 테니, 다른 사람들이 하도록 내버려 두세요.” – 이런 것은 보편적 규칙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점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문: 정언명령은 우리에게 기후 변화에 대한 대응을 도덕적-윤리적 의무로 부여하는지요? 많은 사람이 ‘글로벌한 문제의 경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라고 말합니다만.

답: 칸트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휴가 갈 때 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나는 기후를 구하게 되는 것인가?’라고 물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합리적인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합리적이라면 나 또한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칸트 철학은 우리에게 하나의 지침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을 떠맡아야만 하는,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말입니다. 정언명령은 ‘다른 사람들의 존엄성을 보호해야 하며 그들을 한갓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라는 것을 요구하니까요.

우리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여러 형태의 착취(搾取) 경제도 분명한 사례입니다. 가령 값싼 티셔츠와 가전제품의 원재료들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매우 열악한 상황에서 획득하고 가공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착취 경제에서 벗어나는 것은 개인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를 위한 첫걸음은 바로 그것의 부정의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 역시 정언명령에서 귀결됩니다.

문: 칸트가 없었다면 우리는 무엇을 갖지 못했을까요?

답: 우리의 기본법 안에 있는 인간 존엄성의 개념이겠지요. 독일 연방 공화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표준적 모범이 되어 있는 성숙한 시민이란 개념도 그렇구요. 아마도 유엔 역시 현재와는 다른 모습으로 존재했을 것입니다.

편집자: 칸트는 책과 논문을 쓴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그는 정치가가 아니었으며 무엇을 발명하거나 생명을 구하는 약을 만들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는, 순수한 사유 안에 머물렀던 그의 존재는 우리의 세계에 각인(刻印)되어 있다. 오늘날까지도 말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원문 출처 www.sonntagsblatt.de
번역 이충진 (한성대)

https://www.sonntagsblatt.de/artikel/kultur/300-jahre-kant-politische-relevanz-seines-denkens-ist-ungebrochen

헨리히의 죽음을 추모하며

Dieter Henrich (1927~2022.12.17)

칸트와 피히테, 쉘링, 헤겔 등의 철학이 다룬 다양한 주제들을 새롭게 해석하여 현대화하고, 현시점에서 갖는 의미를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온 사상가.

철학은 연구와 만날 때 가장 생산적이 된다. 칼 마르크스, 에드먼드 후설, 지그문트 프로이트, 위르겐 하버마스 등은 바로 그와 같은 ‘연구하는 철학 정신der forschende philosophische Geist’의 사례들이다. 디터 헨리히Dieter Henrich 역시 그 중 하나이다.

헨리히는 1927년 마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교수자격논문의 주제는 칸트의 실천철학이었다. 이후 피히테, 헤겔, 횔더린으로 이어지는 연구의 중심에는 항상 자기의식의 문제가 놓여 있었다. 그의 평생의 연구주제는 ‘주체성Subjektivität’이었다. 자아는 자신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그는 하이데거학파와 분석철학에서 벗어나 1800년 전후의 철학적 논의에 집중했다.

베를린 대학, 하이델베르크 대학, 뮌헨 대학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헨리히는 고전 텍스트 연구의 표준Standard을 만들었으며, 그럼으로써 모든 세대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여러 대학에 머물면서 독일관념론철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헤겔의 『법철학』까지의 40년을 사람들은 ‘정신의 기적의 시기Wunderjahre des Geistes’라고 말하는데, 그 시기는 헨리히에게도 결정적이었다. 미학, 윤리학, 해석학 등 모든 분야에서 그는 그 시기의 텍스트를 참으로 다채롭게 활용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횔더린을 철학자로 자리매김한 최초의 사람이었으며, 그의 저서 『회상 Andenken』은 최고의 문헌학적 작품이기도 했다. 노년기의 헨리히는 철학 작품들의 생성 과정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는데, 그것은 ‘사유 결과물에 대한 추가적 사유Nachdenken von Gedanken’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헨리히의 작품에는 수많은 노력과 긴장이 묻어 있지만, 인간 헨리히에게서는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꺼려하는 사람이었다. 많은 것을 말하는 자아, 그런 자아가 직면하게 될 위험을 그는 알고 있는 듯했다.

자아는 사물이 아니라 수수께끼이다.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은 수없이 많을 터이다. 그것들의 윤곽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철학자가 2022년 12월 17일 뮌헨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향년 95세였다.

Jürgen Kaube의 추모사 <Schachmeister des Denkens>를 이충진(한성대)선생님께서 ‘대폭’ 축약해서 번역해주셨습니다.

참조: FAZ von 18.12.2022.

장-뤽 낭시를 기리며

박준상┃숭실대 철학과 교수

며칠 전 장-뤽 낭시의 부음을 들었다. 존경하고 좋아하는 이 고령의 철학자의 이름을 ‘혹시나’하는 마음에 가끔 검색하고 나서 안심하곤 했었는데, 결국 결정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낯설기만 하다. 한 번이라도 영혼을 만져본 적이 있었던 한사람의 죽음이 어떻게 때 이른 것이 아닐 수 있는가? 사람은 막연히 자신도 타인도 죽지 않을 것이라 여기며 살고 있는가? 나와 타인의 죽음보다 확실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장-뤽 낭시는 필자의 지도교수는 아니었고, 학위 논문의 보고자rapporteur(박사 논문의 심사 가능성을 판정하고 보고서를 써서 대학과 국가에 전달하는 교수)였다. 필자는 고인과 많은 편지와 메일을 주고받았고, 어느 콘퍼런스에서 스카이프로 대화한 적도 있었지만, 정작 그와 대면했던 것은 2009년 1월 파리에서 열렸던 그에 대한 콘퍼런스 ‘바깥의 형상들’에서의 짧은 만남 한 번뿐이었다. 필자는 그와 인연이 닿았던 수많은 학생 중 하나였을 뿐이고, 그가 이렇게 사라져가는 지금의 장면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는 많은 사람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와 대면의 교류를 나누었던 여러 사람(크리스토프 비덩, 장-미셸 라바테, 자크 랑시에르와 김순기 화백)은 예외 없이 직접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필자에게 낭시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이는 알랭 바디우가 그에 관해 쓴 논문 「약속된 봉헌」에서 공개적으로 밝혔던 대로 “모두가 장-뤽 낭시를 좋아한다”라는 사실의 증거 하나가 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 사실에 특별한 의의意義가 있다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필자는 납득할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은 이런저런 이유로 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일반적인 경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예외적인 측면을 드러낸다. 말하자면 장-뤽 낭시에게는 이런저런 이유 없이, 또한 목적도 없이, 그 자신의 표현대로 ‘무위無爲’를 통해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또한 그렇게 사람들을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게 하는 힘이 있었다. 또한 그 힘은 그의 얼굴⸱표정들과 몸의 직접적 현전 바깥에서도, 가령 그의 편지나 이미지 하나, 그의 보이지 않는 간접적인 접근⸱‘접촉touche’을 통해서도 뚜렷이 표출되었다. 또한 우리가 그의 저작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철학자로서 그는 자신이 말하고 논증하고 주장한 것들 바깥에서, 분명히 밝혀져 드러난 것들을 가로질러서 ‘침묵의 말’을 전달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필자는 낭시가 우리에게 전해주었던 정치적 가르침이 다른 것이 아니었다고 확신한다. 설사 정치의 영역과 우리 각자의 삶(실존)의 영역이 같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 ‘사이’ 또는 관계의 ‘접촉’의 표식(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표식)이 되는 그 ‘침묵의 말’의 표출⸱감지와 유통이 바로 정치에서의 최종심급이라는 것이다. ‘무위’라는 척도 아닌 척도라는 것이다.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예 하나를 들어 생각해보자. 낭시가 자신의 삶과 글쓰기에 너무나도 깊숙이 개입했고,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필립 라쿠-라바르트(그는 라쿠-라바르트를 추도하는 글에서 “나는 깊은 밤 혼자 앉아 라쿠를 생각하며 울고 있다”고 썼지만, 우리로서는 그의 심정에 접근할 수 없다)와 같이 썼던 책 하나인 『나치 신화』에서 암시되었던 대로, 나치들에게서는 과도하게 규정된 분명한, 지나치게 ‘밝혀진avoué’ 언어(이데올로기)만 있었을 뿐, ‘침묵의 말’이 자리 잡을 모든 장소는 미리 파괴되었다. 그들의 언어는 결국 우리와 우리의 관계⸱사이를 절멸하는 결과로만 귀착되었다. 반면 낭시는 라쿠-라바르트와 함께 나치들과는 정반대의 위치에서, 즉 (문학적⸱시적) 침묵을 발판으로 공동체에 다가갔다. 낭시가 사라져가는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결국 하나일 것이다. 어떻게 ‘밝힐 수 없는inavouable’, 불확실한, 그러나 기이할 정도로 명백한, ‘벌거벗은’ 그의 ‘침묵의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인가?

“부서지기 쉬움과 불확실성 가운데에서의 벌거벗음. 가장 밝힐 수 없는 유대 관계에 낯선 것이 있고, 동시에 가장 평범한 만남에 낯선 것이 있다. 그러한 낯선 것, 즉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낯선 것에 노출된, 뚜렷이 내비치는 벌거벗음.” – 『마주한 공동체』

2021년 8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