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서가

소요서가는 2021년 7월 10일에 문을 연 철학 전문서점이다. 전문가에게도 가볍지 않고 애호가에게도 무겁지 않은 서점을 표방하며,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는 임마누엘 칸트의 계몽의 표어를 모토로 삼고 있다. 소요서가는 동명의 출판사를 운영하며, 철학 및 예술 분야의 대중 강좌 및 독서모임을 진행하는 아카데미소요 또한 병행하고 있다.

첫 번째 소요편지: 한발 늦은 개업인사

안녕하세요.

‘철학서점 소요서가’가 지난 7월 10일 을지로 세운청계상가 3층 데크에서 문을 열었습니다. 개업 이래 정말 많은 분들이 방문해 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더 나은 컬렉션으로 여러분을 맞이할 수 있게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동안 누가 소요서가를 운영하고 철학서점의 목적은 무엇인지 많은 분들께서 질문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희가 누구이고 어떤 일을 하는지,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철학서점 소요서가는 ‘연구소 오늘’에서 운영합니다. 연구소 오늘은 2021년 봄에 문을 연 신생 연구소로, 산하에 출판사와 서점 그리고 아카데미를 운영 중입니다.

출판사는 서점과 같은 이름의 ‘소요서가’입니다. 철학, 예술, 역사 분야의 의미있는 외서와 국내 연구진의 작업을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현재 “베르그손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과 “세잔-졸라의 서간집” 등 다수 외서의 번역 출판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서점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철학전문서점입니다. 전문가에게도 가볍지 않고 애호가에게도 무겁지 않은 서점을 표방하며 7월 10일 을지로에서 문을 열었습니다. 동서양 철학의 고전과 양질의 해설서들을 구비하고 있고, 다양한 철학 분야의 입문 교양서들 역시 비치해 두었습니다. 출판사와 서점의 이름이 같은 이유는, 파리의 철학 출판사 겸 전문서점인 Vrin을 모델로 삼아 저희 역시 출판-서점을 연동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카데미 소요’는 서점을 기반으로 온/온프라인에서 동시에 진행하려고 합니다. 현재 플라톤을 시작으로 하는 <서양 철학사 강의>가 올해 8월부터 내년 7월까지 계획되어 있고, 강의일정은 조만간 공개될 예정입니다. 월 2회씩 일년간 총 24번에 걸쳐 진행될 강의는, 각 분야의 전문가 선생님들을 모시고 매달 선정된 이달의 철학자의 대표 저작을 통해 서양 철학의 긴 흐름을 살펴보는 대중 강의입니다. 일년 강의가 끝난 후에는 강의록을 모아 소요서가 출판사에서 책으로 출간할 계획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이상 저희가 누구이고 무슨 일을 하는지 간단히 말씀드렸습니다. 지금부터는 저희가 지향하는 바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번에는 서점에서부터 출발해 보겠습니다.

철학서점 소요서가를 방문해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희는 간판을 올리는 대신 그 자리에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여덟 개의 언어로 적어 두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조르주 캉길렘(Georges Canguilhem)은 이 질문의 특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철학의 의미와 본질에 대해 묻는 질문 자체가 철학을 구성한다.’

이 말에 충실할 경우, 철학은 자신에 대해 묻는 질문 속에 심오한 답을 숨겨두는 대신, 한번이라도 이 질문을 마주치거나 던져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철학적’이 되도록 허락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간판 자리에 적어 둠으로써, 철학서점 소요서가라는 이름보다는 ‘여러분을 철학적 사유로 초대하고 싶다’는 의중을 먼저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저희가 생각하는 철학이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잠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마지막 부분을 참조해 보겠습니다. 그곳에서 칸트는 ‘철학과 수학은 서로 다른 방법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수학은, 특히 기하학은 점, 선, 면 같은 개념들을 스스로 만드는 정의에서부터 시작하는 종합적 방법을 따른다면, 철학은 실체, 원인, 필연처럼 이미 주어진 개념들을 사용하면서 시작해 마지막에 그 의미를 해설하는 정의에 도달하는 분석적 방법을 따른다고 말입니다.

칸트가 수학과 구별해서 강조한 철학의 특수성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저희는 잠시 문학과 철학의 관계로 우회해볼까 합니다. 사실 어떤 작가도 작품을 시작하기에 앞서 선이나 악 같은 개념을 먼저 떠올리지는 않을 겁니다. 오히려 구체적 사건들을 사용해 서사를 완성하면, 그런 서사가 특정 개념들을 시사하는 상징으로 작동하곤 합니다. 반면 철학은, 칸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개념들을 사용하면서 시작합니다. 철학자가 개념들의 관계에서 서사를 완성하면, 그런 서사가 도식이나 상징의 형태로 의미를 획득하고 다시 구체적 사건들을 포섭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집니다.

이 맥락에서 저희가 생각하는 철학은 개념들의 현실로의 이행, 또는 이런 이행을 가능하게 만드는 서사화 과정으로서의 ‘비판’입니다. 따라서 저희는 여러분께서 철학서점 소요서가에서 ‘개념이 현실로 옮겨가는 물질화 과정’을 경험해주시길 희망합니다. 거창한 말처럼 들리지만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따라 서점에 들어오신 뒤, 철학이란 특정 분야의 개념들이 한데 모여 있는 풍경의 물질적 힘을 음미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철학에 대해 저희 서점이 이처럼 생각하는 바는 사실 연구소 오늘의 운영구조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영화계에는 이미 제작-유통-상영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있듯이, 저희는 출판-서점-아카데미로 이어지는 구조 속에서 개념의 제작과 유통, 그리고 상영을 연결하려고 합니다. ‘도서출판 소요서가’가 개념들의 서사화에 주력한다면, ‘철학서점 소요서가’는 서사화된 개념들이 현실로 이행하는 체험의 장을 제공하고, ‘아카데미 소요’는 현실로 옮겨온 철학적 개념들이 구체적 의미를 드러내는 과정을 통해, 다시 오늘의 우리를 겨냥한 새로운 개념들이 창조될 수 있는 계기가 생겨나기를 기대합니다.

따라서 연구소 오늘은 도서출판 소요서가, 철학서점 소요서가, 아카데미 소요가 순환되는 구조 속에서,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오늘을 향한 철학적 비판이 되는 사태를 실현하고, 이러한 경험을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기를 지향합니다.

지금까지 철학서점 소요서가를 운영하는 저희가 누구이고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앞으로도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관심 부탁드리며, 운영상의 실수는 있을지언정 방향성을 잃어버리지는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두 번째 소요편지에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